마산항도선사회 홈페이지를 찾아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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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도선의 역사와 연혁
제1절 도선사(PILOT)의 어원 및 정의
중세기 초 도선사를 의미하는 일반적인 용어는 lead 또는 guide를 의미의 앵글로 색슨어로부터 유래된 lodesman이었다. 당시 남극성(南極星)은 Lodestar로 알려져 있었다. Lods, lotse라는 낱말은 오늘날까지도 스칸디나비아, 독일 및 네덜란드에서 사용되고 있다. Pilot라는 용어의 다른 어원 설명으로는 네덜란드어의 PIJL(棒)과 Loct(測深船) 합성어인 PIJLOOT 또는 POLOOT라는 단어에서 유래했다고 하는 설이 있고, 또 다른 설은 희랍어의 PENDON(舵·舵板)에서 유래해 중세기 이태리어의 PEDOTA를 거쳐 영어의 PILOT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15세기 이전에 지중해 밖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pilot라는 용어는 그리스어의 plous 또는 pelous에 어원을 두고 있다. plous 또는 pelous가 pilot로 변화됐다.고대의 'Periplous'는 수로지를 가리키는 단어들 가운데 하나였다.(Peri=around or circle, Plous=navigation: 따라서 Periplous=Circumnavigation 즉 일주항해를 뜻한다.) 여기에서 Plous또는 Pelous가 Pilot로 변화되었다는 것이다. Pilot이 적힌 초기의 기록물은 AD 64년에 쓰여진 홍해 및 북인도양에 대한 해상상인의 안내책자인 Periplous of Erythraean sea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책자에는 Cambay과 Narbuda江으로부터 Barygaza(오늘날 인도 북동쪽에 있는 Brocah)에 이르는 접근수로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다.
1513년 Deptford 도선사협회(Trinity House) 헌장에는 도선사를 lodesman, pilot 및 pilot-lodesman으로 부르고 있었고 같은 시기에 Cinque Ports의 도선사단체(Court of loadmanage)는 도버해협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도선에 관련된 법은 Rhodes섬 (B.C 400), (Oleron(A.D 1199)및 Visby(16세기)등 몇 개의 해사법전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고, 이들 법전들은 대부분 해상무역의 보험측면을 기술하는 해사법의 근거가 되었다.
Oleron법전은 선박을 그 기지나 모항으로부터 일정거리까지 이동시키는데 필요한 능력을 가진 항해사를 고용할 것에 대한 규정과 도선사의 의무 규정을 정하였으며, 1344년에 이르러 Oleron 지방자치단체의 법률에 수로안내인(Petit Lomant)을 "항구나 포구의 위험을 잘 알고 있고, 항구나 포구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자"로 규정하는 조항이 삽입되었다. Sea Pilot 또는 선박의 항해사는 'Grand Loman'로 불렸으며, 20세기 들어 프랑스의 도선사은 종종 'Pilote-Lamaneur'로 불리기도 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선박 導船(Pilotage)의 필요성은 선박에서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던 선장의 판단에 따라 결정되었다. 항해술이나 조선기술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중세이전에 도선사는 대양을 횡단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항해술의 기술자로서 그 어떤 직능자들보다도 절실히 필요한 존재였다. 연안이나 대양을 따라 항해하던 선박들은 미지의 세계에 발을 내 딛으면, 그곳 연안의 정보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원주민(대부분이 고기잡이 어부들)에게 상당한 수준의 대가를 지불하거나 또는 강제적으로 그들을 승선시켜 지역정보를 얻어 내곤 했다.
이후 점차 조선기술과 해운이 발달함에 따라 전 세계 곳곳이 잘 알려지고, 특정지역을 여러 차례 항해하여 그곳의 정보를 제 손금 보듯이 잘 알고 있는 항해사와 선잘들이 늘어남에 따라 개별 운항업자별로, 또는 국가적 차원에서 이들을 고용하여 항해의 안전을 도모하기에 이른다. 이같은 선박 도선은 선박을 통한 교역이 활발하던 중세기 전반 지중해를 중심으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마르코 폴로는 아랍인 도선사를 고용하여 인도양을 건널 수 있었으며,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할 당시에도 그의 산타 마리호에는 도선사가 타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 대양을 항해하는 항해술이 보편화되어 대양에서의 도선의 필요성이 줄어든 반면, 선박이 대형화됨에 따라 항만이나 수로, 자연조건에 정통한 항해사들을 주축으로 특정지역에 대한 도선서비스의 제공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 결과, '좁은 수로나 항만에서 거대선을 안전하고 신속하게 입,출항시키거나 접.이안하는 선박조종의 기술자'라는 이미지로 도선사의 위상이 재정립되기에 이른다.
한편 근대에 들어와 이러한 개별적인 도선서비스에 격렬한 경쟁이 붙게 되어 도선서비스의 질적 저하와 해양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하자, 국가에서 이를 체계적으로 관리해야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나 도선업무의 전문성으로 인해 도선제도의 체계적 관리는 정부의 노력만으로는 한계에 봉착할 수 밖에 없었다. 그 결과 국가와 지역 도선사가 상호 협조하는 도선관리체제가 국가별 항만별로 다양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더욱이 자국 영해내의 일정지역을 항해하는 선박에 대해 도선사의 승선을 의무화 함으로써 해양사고 발생률을 낮추고, 오늘날 특히 문제시되고 있는 해양환경오염을 방지하기 위해 선빅해운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국가가 강제도선제도를 채택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도선운영체제를 직.간접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제2절 도선의 유래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기원전 1000년경 고대 페니키아(현재의 레바존 부근)의 항구 '다니아'에서 파일럿이 활동했다고 한다. 파일럿의 활동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세계사적 관점에서 중세기 전반 지중해를 중심으로 전개도니 해상무역을 보면, 동무역 루트에서는, 베니스와 제노아의 선주가 이집트와 시리아 및 팔레스타인 등지에서 베니스와 제노아로 연결되는 동항로에서 서양의 물건을 동양으로, 동양의 물건을 서양으로 수송하였으며, 서무역 루트로서는, 베니스 및 제노아에서 스페인, 프랑스, 영국 등으로 연결되는 서항로를 통하여 동양의 물건과 서양의 물건이 교환되었다.
무역이 성행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연안과 대양에서 파일럿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졌다. 1275년 마르코 폴로가 처음으로 항해에 나서 인도양을 건널 때 아랍인 파일럿이 그와 함께 있었다.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에 처음 발을 내 딛었을 때에도 기함 산타 마리아호에는 지안 데 라 코사라는 파일럿이 승선해 있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1588년 당시 세계 최강의 함대였던 스페인 무적함대가 영국 함대에게 대패하여 스페인 왕국이 몰락의 길로 들어선 것도, 스페인 함대에 파일럿이 승선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을 정도이다. 파일럿의 승선 여북 국가의 운명을 좌우한 역사적 사례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의 경우 도선이 이루어졌다는 최초의 기록은, 안타깝게도 가깝고도 먼 이웃나라인 일본의 역사 기록에 나타난다. 9세기 일본인 승려 圓仁이 남긴 入에는, 당시 왜의 (630년~894년)이 한국 남해안을 거쳐 북안 항로를 향도할 자들을 배에 태웠다는 기록이 보인다. 당시는 신라장보고가 을 장악하여 우리나라 연안 특히 황해는 물론 동남아 연안에 이르기까지 위세를 떨치던 시기로, 왜의 에 승선한 향도인들 대부분이 신라인들이었다는 것이다. 이렇듯 장보고가 큰 세력으로 등장하게 된 원인을 그가 당시의 노련한 선원들을 통콸한 海長으로서 해상무역에서 큰 부를 축적한 데에서 찾기도 하지만, 그후 오랜기간 동안 사대주의적 사고와 해상인들에 대한 사회적인 편견으로 인해 해양으로의 발전은 그 빛을 잃고 쇠락의 길로 접어 들었다.
삼국시대에서 조선조 초까지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우리나라의 해상활동은 사대주의적 사고와 쇄국 정책의 영향으로 겨우 그 명맥을 근근이 유지되었을 뿐이다. 이는 구한말까지 존속했던 에서 그 전말을 일단을 확인할 수 있다. 는 국가재정의 기초를 이루는 안전운송에 중점을 둔 연안수송에 관한 것이지만, 에 에 익숙한 者로 하여금 도선케 한 전근대적 형태의 역할이 포함되어 있어 주목된다. 이 에 의한 도선이 우리나라 도선사 및 도선업의 효시인 것으로 보인다.
19세기 중반 이후 우리나라는 일본과 구미 열강과 잇따라 불평등조약을 체결하여 국내 항만이 개항을 하게 되었다. 20세기 초 1910년 굴욕적인 한일늑약에 따라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점한 후로 1915년 조선총독부량 제5호 朝鮮水先令이 제정되어 도선사의 역할과 위상, 지위 등이 구정되었는데 이는 당시 일본에서 시행되고 있던水先法(1899년 제정) 에 근거를 둔 것이었다.
제3절 최근 도선제도의 현황
도선(Pilotage)은 항만에서 제공되는 주요한 안전서비스의 하나로 "항만에서의 안전"은 물론, "항만서비스의 질"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그 결과로서, 세계 각국에서는 항만의 안전 확보와 항만운영 효율화를 위해 항만내 입출항하는 모든 선박에게 도선사 승선을 의무화(이를 '강제도선'이라 함)하고 있는 것이다.
제4절 마산항도선의 연혁
높은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리아스식 해안의 수려한 경관을 지니고, 한반도의 동남단, 경상남도의 중앙부에 위치한 마산(馬山). 마산은 경상남도의 중부해안에서 내륙 쪽으로 깊숙이 만입한 마산만에 위치하고 있으며, 인접한 창원시와 진해시 및 진주시, 함안군, 고성군등의 중부 경남지역을 배후지로 하는 항구도시다.
마산은, 동쪽으로는 부산시가 북쪽으로는 대구시가 위치하고 있으며, 인접한 진해시 . 창원시와 함께 경제적 . 사회적 도시기능의 분담이라는 측면에서 상호 깊은 관계를 가지는 광역 도시권을 형성하고 있다. 마산은 지방 산업 개발 중심도시로서 지역의 발전과 국가적으로 국민생산의 증대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곳이다. 역사 속에서 마산은 신라35대 경덕왕 이전에 마산항은 ‘골포(骨浦)’, 마산은 ‘골포현(骨浦縣)’이라 불리며 ‘굴자군(屈自郡)’에 속한 지역이었는데, 골포현 당시의 유적이 지금도 시내 환주산(추산동 정수장 부근)에 남아 있다.이곳은 고려시대 제25대 충렬왕 대(1274년)원나라와 함께 일본을 정벌하려던 동정군의 근거지가 된 지역으로, 의안이 ‘의창현(義昌縣)으로, 합포현이 회원현(會原縣)으로 독립되었다. 조선왕조 태종 대(1400년)에 의창현과 회원현이 합쳐서 ’창원군(昌原郡)이 되었으며 이곳에 도호부가 설치되었다.
오늘의 마산포가 출현된 것은 조선중기 이후의 일이다. 조선왕조 현종 4년 1663년 대동법이 시행됨에 따라 낙동강 하류 유역 14군의 조공미를 서울로 조운하는 격납고인 조창(현남성동 제일은행 지점자리)이 이곳에 설치되어, 공관과 민가가 급속도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이 일대에 중성리 . 오산리 . 서성리 . 성산리 . 성호리 등 6개리가 형성되어 오늘날 마산의 기반이 마련되었으며, 종래의 마산포는 ‘창원항(昌原港)’ 또는 ‘구강(舊江)’이라 불리게 되었다. 1899년(광무 3년) 5월 1일 마산포가 개항장으로 발족되고 창원감리서가 설치되어 외교사무와 지방행정을 관장하는 한편, 각국 거류지제가 설치됨에 따라 일본 영사관이 설치되었다. 1906년 영사관은 이사청으로 개편되고 1914년 부제실시에 의해 마산부가 되었다. 해방 후 1949년 6월 29일 개항장으로 지정되고 그해 8월 15일 부가 시로 개편되어 오늘날의 마산시가 되었다.
마산시는 경상북도 포항에서 전라남도의 여수에 이르는 한국의 남동임해 중화학공업지역 중의 중요한 상공업도시로서, 광대한 수출자유지역과 인접한 창원기계공업기지의 수출형 산업 집중으로 지속적인 도시 발전이 예상되는 곳이다. 또한 우리나라 상품의 해외시장 확대와 수출증대에 있어 핵심적 역할이 되는 지역이기도 하다.
마산시는 미래로 앞서가는 첨단산업도시, 세계로 뻗어가는 항만물류도시, 시민의 얼이 뭉친 문화관광도시, 자연과 어우러진 해양관광도시를 모토로 발전의 속도를 늦추지 않고 있다.
한반도 동남단에 위치한 마산항은 남쪽을 제외하고 3방향이 천연의 병풍을 형성하고 있다. 남방에는 멀리 거제도와 가덕도를 비롯한 크고 작은 섬들이 외해로부터 진입하는 파랑을 막아주는 천연적인 도시가 마산이며, 마산항은 본항인 마산항을 비롯하여, 옥포항, 장승포항, 진해항, 통영항, 고현항등으로 이루어진 광역도선구 항만이다.
1899년 개항 이래 마산항은 자연적, 지리적 여건을 갖춘 천해의 양항으로 남해, 구마고속도로 등 잘 발달된 배후수송망과 연간 1천만톤 이상의 화물을 처리할 수 있는 최신 항만시설을 갖춘 항구로, 일본, 중국, 홍콩, 마닐라, 인도 등 환태평양과 동남아시아권의 중심 교역항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광역도선구 내 각 항구를 살펴보면, 먼저 마산항의 항만시설로 선박 접안시설인 부두는 일제 말기에 조성된 제1부두, 제2부두 및 중앙부두와 1970년 마산수출자유지역의 설치에 따라 건설된 제3부두, 1985년부터 시작된 마산시의 대단위 매립사업으로 새로이 건설된 서항부두가 있다. 창원기계공업기지 건설에 따른 지원시설로서 마산항 제4부두, 제5부두 등이 일반화물 부두로 이용되고 있다. 특히 마산항 제4부두는 지역경제 기여도와 부가가치가 높은 컨테이너와 자동차의 전용부두로 운영하고 있으며 제4부두를 통한 자동차 수출실적은 연간 15만대를 넘어서고 있다. 이 가운데 제4부두의 일부는 컨테이너 전용부두이다.
마산항의 선박 접안시설 총길이는 부두 3천 838m, 물양장 1천 749m, 돌핀 273m 이며, 2만톤급 대형선박 11척을 비롯한 총 23척의 화물선과 소형어선이나 유조선 등이 동시 접안할수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항내의 묘박지(錨泊地)는 9개소이며, 3척의 선박이 묘박할 수 있다. 마산항이 갖는 하역능력은 연간 957만9천톤이며, 해안 야적장의 넓이는 26만8천m² 약8만 1천 70평으로써 80만 4천톤의 화물을 장치할 수 있다. 내륙 깊숙이 들어온 마산만에 위치한 마산항은 거제도, 가덕도 등의 도서가 천연의 방파제 구실을 해 주는 천해의 영향으로서, 인접한 창원 공업도시와 마산의 수출자유지역과 편리한 육상교통의 발달에 따라 영남 내륙지방까지 배후지가 확대되어 항구적 기능이 강화되면서 일본 및 세계 각지로 연결하는 관문으로서의 중요성이 날로 높아가고 있다. 또한 남해안에 발달한 수산 양식 및 어장의 어획물 집산지이자 연안 도서지역과 해운교통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톡톡히 담당하는 마산항은 국내외적으로도 그 역할이 더욱 중요시되는 항구이다.
삼천포항은 1966년 4월 16일 무역항으로 지정되어 남해안과 서해안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서부 경남의 관문으로, 수출 광석류, 고령토 등을 처리하는 동시에 화력발전소 연료 수송지원항으로 발전하고 있다. 옥포항은 정부의 중화학 공업 육성방침으로 1973년 10월 옥포조선소가 준공되면서 1974년 5월 개항장으로 지정되었다. 최대 100만 D/W급 조선능력을 갖춘 대형조선소로 조선도크와 의장안벽이 축조되었다. 옥포조선소는 최신의 합리적이고 정교한 생산 장비와 설비를 갖춘 최신식 다목적 조선소이다. 조선공업 지원항만으로서 건조 도크2기, 부양식 도크3기, 의장안벽2,738m, 하역안벽100m가 있으며 접안시설로는 2만톤급 1선석이 있다. 장승포항은 1965년 6월 25일 무역항으로 지정되었으며, 부산-거제간 연안여객선의 입출항으로, 도서민과 관광객을 수송하는 거제 동남단에 위치한 관문항이며 수산업지원항만이다.
진해항은 1965년 진해화학 공장이 가동되면서 항만개발이 시작되었으며, 1976년 제 1종 지정항만으로 고시되면서 본격적인 개발이 이루어져 1991년에는 국제항으로 지정되어 부두연장 883m, 1,715천톤 규모의 하역능력을 갖춘 항만으로 성장하였다. 비료, 곡물류, 철재등이 주종화물로 유통되며, 항만시설은 연차적으로 확충되고 있다. 또한 주지하듯이 한국해군의 요람이자 벚꽃의 고장으로도 유명한 항만이다.
통영항은 한려수도의 비경을 간직한 한국의 나폴리로 불리는 곳으로, 1963년 9월 개항한 뒤로 수산물의 수출입을 담당하고 있는 국제무역항이다. 통영지역의 수산물 생산량은 전국 생산량의 10%에 해당하는 연간 27만톤의 수산물로, 이곳은 우리나라 연근해 어업의 전진기지항이자 남해안에 산재되어 있는 크고 작은 섬들을 연결하는 해상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고현항은 1983년 8월 1종지정항으로 지정, 개항장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거제 지역의 일반화물을 해상 수송할 수 있는 접안시설을 갖추고 지역 경제발전에 기여하고 있는 항구이다.
거제조선소는 1백만평의 부지위에 의장안벽 2,615m, 하역안벽 789m, 최대 1백만 DWT급의 선박을 건할 수 있는 건조 도크 3기를 보유하고 있고, 각종 최신 첨단 장비 시설을 갖춘 세계적인 조선소의 위용을 자랑한다. 1978년 이곳에서 선박건조가 시작된 이래 현재 세계3위 규모의 대단위 조선공업기지가 되었다.
마산시의 발전을 주도적으로 이끄는 마산항에 미주 및 유럽지역 항로가 추가로 개설되면 이곳은 명실상부한 동남북아 물류 중추항의 면모를 갖춘 곳으로 전망되는 항구이기도 하다.
1961년 처음 도선사가 부임하였으며 도선사회에 소속되어 있는 모든 도선사가 오늘도 선박의 안전한 도선을 수행하고 있다.
제1장 도선의 역사와 연혁
제1절 도선사(PILOT)의 어원 및 정의
중세기 초 도선사를 의미하는 일반적인 용어는 lead 또는 guide를 의미의 앵글로 색슨어로부터 유래된 lodesman이었다. 당시 남극성(南極星)은 Lodestar로 알려져 있었다. Lods, lotse라는 낱말은 오늘날까지도 스칸디나비아, 독일 및 네덜란드에서 사용되고 있다. Pilot라는 용어의 다른 어원 설명으로는 네덜란드어의 PIJL(棒)과 Loct(測深船) 합성어인 PIJLOOT 또는 POLOOT라는 단어에서 유래했다고 하는 설이 있고, 또 다른 설은 희랍어의 PENDON(舵·舵板)에서 유래해 중세기 이태리어의 PEDOTA를 거쳐 영어의 PILOT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15세기 이전에 지중해 밖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pilot라는 용어는 그리스어의 plous 또는 pelous에 어원을 두고 있다. plous 또는 pelous가 pilot로 변화됐다.고대의 'Periplous'는 수로지를 가리키는 단어들 가운데 하나였다.(Peri=around or circle, Plous=navigation: 따라서 Periplous=Circumnavigation 즉 일주항해를 뜻한다.) 여기에서 Plous또는 Pelous가 Pilot로 변화되었다는 것이다. Pilot이 적힌 초기의 기록물은 AD 64년에 쓰여진 홍해 및 북인도양에 대한 해상상인의 안내책자인 Periplous of Erythraean sea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책자에는 Cambay과 Narbuda江으로부터 Barygaza(오늘날 인도 북동쪽에 있는 Brocah)에 이르는 접근수로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다.
1513년 Deptford 도선사협회(Trinity House) 헌장에는 도선사를 lodesman, pilot 및 pilot-lodesman으로 부르고 있었고 같은 시기에 Cinque Ports의 도선사단체(Court of loadmanage)는 도버해협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도선에 관련된 법은 Rhodes섬 (B.C 400), (Oleron(A.D 1199)및 Visby(16세기)등 몇 개의 해사법전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고, 이들 법전들은 대부분 해상무역의 보험측면을 기술하는 해사법의 근거가 되었다.
Oleron법전은 선박을 그 기지나 모항으로부터 일정거리까지 이동시키는데 필요한 능력을 가진 항해사를 고용할 것에 대한 규정과 도선사의 의무 규정을 정하였으며, 1344년에 이르러 Oleron 지방자치단체의 법률에 수로안내인(Petit Lomant)을 "항구나 포구의 위험을 잘 알고 있고, 항구나 포구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자"로 규정하는 조항이 삽입되었다. Sea Pilot 또는 선박의 항해사는 'Grand Loman'로 불렸으며, 20세기 들어 프랑스의 도선사은 종종 'Pilote-Lamaneur'로 불리기도 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선박 導船(Pilotage)의 필요성은 선박에서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던 선장의 판단에 따라 결정되었다. 항해술이나 조선기술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중세이전에 도선사는 대양을 횡단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항해술의 기술자로서 그 어떤 직능자들보다도 절실히 필요한 존재였다. 연안이나 대양을 따라 항해하던 선박들은 미지의 세계에 발을 내 딛으면, 그곳 연안의 정보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원주민(대부분이 고기잡이 어부들)에게 상당한 수준의 대가를 지불하거나 또는 강제적으로 그들을 승선시켜 지역정보를 얻어 내곤 했다.
이후 점차 조선기술과 해운이 발달함에 따라 전 세계 곳곳이 잘 알려지고, 특정지역을 여러 차례 항해하여 그곳의 정보를 제 손금 보듯이 잘 알고 있는 항해사와 선잘들이 늘어남에 따라 개별 운항업자별로, 또는 국가적 차원에서 이들을 고용하여 항해의 안전을 도모하기에 이른다. 이같은 선박 도선은 선박을 통한 교역이 활발하던 중세기 전반 지중해를 중심으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마르코 폴로는 아랍인 도선사를 고용하여 인도양을 건널 수 있었으며,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할 당시에도 그의 산타 마리호에는 도선사가 타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 대양을 항해하는 항해술이 보편화되어 대양에서의 도선의 필요성이 줄어든 반면, 선박이 대형화됨에 따라 항만이나 수로, 자연조건에 정통한 항해사들을 주축으로 특정지역에 대한 도선서비스의 제공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 결과, '좁은 수로나 항만에서 거대선을 안전하고 신속하게 입,출항시키거나 접.이안하는 선박조종의 기술자'라는 이미지로 도선사의 위상이 재정립되기에 이른다.
한편 근대에 들어와 이러한 개별적인 도선서비스에 격렬한 경쟁이 붙게 되어 도선서비스의 질적 저하와 해양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하자, 국가에서 이를 체계적으로 관리해야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나 도선업무의 전문성으로 인해 도선제도의 체계적 관리는 정부의 노력만으로는 한계에 봉착할 수 밖에 없었다. 그 결과 국가와 지역 도선사가 상호 협조하는 도선관리체제가 국가별 항만별로 다양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더욱이 자국 영해내의 일정지역을 항해하는 선박에 대해 도선사의 승선을 의무화 함으로써 해양사고 발생률을 낮추고, 오늘날 특히 문제시되고 있는 해양환경오염을 방지하기 위해 선빅해운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국가가 강제도선제도를 채택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도선운영체제를 직.간접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제2절 도선의 유래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기원전 1000년경 고대 페니키아(현재의 레바존 부근)의 항구 '다니아'에서 파일럿이 활동했다고 한다. 파일럿의 활동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세계사적 관점에서 중세기 전반 지중해를 중심으로 전개도니 해상무역을 보면, 동무역 루트에서는, 베니스와 제노아의 선주가 이집트와 시리아 및 팔레스타인 등지에서 베니스와 제노아로 연결되는 동항로에서 서양의 물건을 동양으로, 동양의 물건을 서양으로 수송하였으며, 서무역 루트로서는, 베니스 및 제노아에서 스페인, 프랑스, 영국 등으로 연결되는 서항로를 통하여 동양의 물건과 서양의 물건이 교환되었다.
무역이 성행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연안과 대양에서 파일럿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졌다. 1275년 마르코 폴로가 처음으로 항해에 나서 인도양을 건널 때 아랍인 파일럿이 그와 함께 있었다.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에 처음 발을 내 딛었을 때에도 기함 산타 마리아호에는 지안 데 라 코사라는 파일럿이 승선해 있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1588년 당시 세계 최강의 함대였던 스페인 무적함대가 영국 함대에게 대패하여 스페인 왕국이 몰락의 길로 들어선 것도, 스페인 함대에 파일럿이 승선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을 정도이다. 파일럿의 승선 여북 국가의 운명을 좌우한 역사적 사례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의 경우 도선이 이루어졌다는 최초의 기록은, 안타깝게도 가깝고도 먼 이웃나라인 일본의 역사 기록에 나타난다. 9세기 일본인 승려 圓仁이 남긴 入에는, 당시 왜의 (630년~894년)이 한국 남해안을 거쳐 북안 항로를 향도할 자들을 배에 태웠다는 기록이 보인다. 당시는 신라장보고가 을 장악하여 우리나라 연안 특히 황해는 물론 동남아 연안에 이르기까지 위세를 떨치던 시기로, 왜의 에 승선한 향도인들 대부분이 신라인들이었다는 것이다. 이렇듯 장보고가 큰 세력으로 등장하게 된 원인을 그가 당시의 노련한 선원들을 통콸한 海長으로서 해상무역에서 큰 부를 축적한 데에서 찾기도 하지만, 그후 오랜기간 동안 사대주의적 사고와 해상인들에 대한 사회적인 편견으로 인해 해양으로의 발전은 그 빛을 잃고 쇠락의 길로 접어 들었다.
삼국시대에서 조선조 초까지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우리나라의 해상활동은 사대주의적 사고와 쇄국 정책의 영향으로 겨우 그 명맥을 근근이 유지되었을 뿐이다. 이는 구한말까지 존속했던 에서 그 전말을 일단을 확인할 수 있다. 는 국가재정의 기초를 이루는 안전운송에 중점을 둔 연안수송에 관한 것이지만, 에 에 익숙한 者로 하여금 도선케 한 전근대적 형태의 역할이 포함되어 있어 주목된다. 이 에 의한 도선이 우리나라 도선사 및 도선업의 효시인 것으로 보인다.
19세기 중반 이후 우리나라는 일본과 구미 열강과 잇따라 불평등조약을 체결하여 국내 항만이 개항을 하게 되었다. 20세기 초 1910년 굴욕적인 한일늑약에 따라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점한 후로 1915년 조선총독부량 제5호 朝鮮水先令이 제정되어 도선사의 역할과 위상, 지위 등이 구정되었는데 이는 당시 일본에서 시행되고 있던水先法(1899년 제정) 에 근거를 둔 것이었다.
제3절 최근 도선제도의 현황
도선(Pilotage)은 항만에서 제공되는 주요한 안전서비스의 하나로 "항만에서의 안전"은 물론, "항만서비스의 질"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그 결과로서, 세계 각국에서는 항만의 안전 확보와 항만운영 효율화를 위해 항만내 입출항하는 모든 선박에게 도선사 승선을 의무화(이를 '강제도선'이라 함)하고 있는 것이다.
제4절 마산항도선의 연혁
높은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리아스식 해안의 수려한 경관을 지니고, 한반도의 동남단, 경상남도의 중앙부에 위치한 마산(馬山). 마산은 경상남도의 중부해안에서 내륙 쪽으로 깊숙이 만입한 마산만에 위치하고 있으며, 인접한 창원시와 진해시 및 진주시, 함안군, 고성군등의 중부 경남지역을 배후지로 하는 항구도시다.
마산은, 동쪽으로는 부산시가 북쪽으로는 대구시가 위치하고 있으며, 인접한 진해시 . 창원시와 함께 경제적 . 사회적 도시기능의 분담이라는 측면에서 상호 깊은 관계를 가지는 광역 도시권을 형성하고 있다. 마산은 지방 산업 개발 중심도시로서 지역의 발전과 국가적으로 국민생산의 증대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곳이다. 역사 속에서 마산은 신라35대 경덕왕 이전에 마산항은 ‘골포(骨浦)’, 마산은 ‘골포현(骨浦縣)’이라 불리며 ‘굴자군(屈自郡)’에 속한 지역이었는데, 골포현 당시의 유적이 지금도 시내 환주산(추산동 정수장 부근)에 남아 있다.이곳은 고려시대 제25대 충렬왕 대(1274년)원나라와 함께 일본을 정벌하려던 동정군의 근거지가 된 지역으로, 의안이 ‘의창현(義昌縣)으로, 합포현이 회원현(會原縣)으로 독립되었다. 조선왕조 태종 대(1400년)에 의창현과 회원현이 합쳐서 ’창원군(昌原郡)이 되었으며 이곳에 도호부가 설치되었다.
오늘의 마산포가 출현된 것은 조선중기 이후의 일이다. 조선왕조 현종 4년 1663년 대동법이 시행됨에 따라 낙동강 하류 유역 14군의 조공미를 서울로 조운하는 격납고인 조창(현남성동 제일은행 지점자리)이 이곳에 설치되어, 공관과 민가가 급속도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이 일대에 중성리 . 오산리 . 서성리 . 성산리 . 성호리 등 6개리가 형성되어 오늘날 마산의 기반이 마련되었으며, 종래의 마산포는 ‘창원항(昌原港)’ 또는 ‘구강(舊江)’이라 불리게 되었다. 1899년(광무 3년) 5월 1일 마산포가 개항장으로 발족되고 창원감리서가 설치되어 외교사무와 지방행정을 관장하는 한편, 각국 거류지제가 설치됨에 따라 일본 영사관이 설치되었다. 1906년 영사관은 이사청으로 개편되고 1914년 부제실시에 의해 마산부가 되었다. 해방 후 1949년 6월 29일 개항장으로 지정되고 그해 8월 15일 부가 시로 개편되어 오늘날의 마산시가 되었다.
마산시는 경상북도 포항에서 전라남도의 여수에 이르는 한국의 남동임해 중화학공업지역 중의 중요한 상공업도시로서, 광대한 수출자유지역과 인접한 창원기계공업기지의 수출형 산업 집중으로 지속적인 도시 발전이 예상되는 곳이다. 또한 우리나라 상품의 해외시장 확대와 수출증대에 있어 핵심적 역할이 되는 지역이기도 하다.
마산시는 미래로 앞서가는 첨단산업도시, 세계로 뻗어가는 항만물류도시, 시민의 얼이 뭉친 문화관광도시, 자연과 어우러진 해양관광도시를 모토로 발전의 속도를 늦추지 않고 있다.
한반도 동남단에 위치한 마산항은 남쪽을 제외하고 3방향이 천연의 병풍을 형성하고 있다. 남방에는 멀리 거제도와 가덕도를 비롯한 크고 작은 섬들이 외해로부터 진입하는 파랑을 막아주는 천연적인 도시가 마산이며, 마산항은 본항인 마산항을 비롯하여, 옥포항, 장승포항, 진해항, 통영항, 고현항등으로 이루어진 광역도선구 항만이다.
1899년 개항 이래 마산항은 자연적, 지리적 여건을 갖춘 천해의 양항으로 남해, 구마고속도로 등 잘 발달된 배후수송망과 연간 1천만톤 이상의 화물을 처리할 수 있는 최신 항만시설을 갖춘 항구로, 일본, 중국, 홍콩, 마닐라, 인도 등 환태평양과 동남아시아권의 중심 교역항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광역도선구 내 각 항구를 살펴보면, 먼저 마산항의 항만시설로 선박 접안시설인 부두는 일제 말기에 조성된 제1부두, 제2부두 및 중앙부두와 1970년 마산수출자유지역의 설치에 따라 건설된 제3부두, 1985년부터 시작된 마산시의 대단위 매립사업으로 새로이 건설된 서항부두가 있다. 창원기계공업기지 건설에 따른 지원시설로서 마산항 제4부두, 제5부두 등이 일반화물 부두로 이용되고 있다. 특히 마산항 제4부두는 지역경제 기여도와 부가가치가 높은 컨테이너와 자동차의 전용부두로 운영하고 있으며 제4부두를 통한 자동차 수출실적은 연간 15만대를 넘어서고 있다. 이 가운데 제4부두의 일부는 컨테이너 전용부두이다.
마산항의 선박 접안시설 총길이는 부두 3천 838m, 물양장 1천 749m, 돌핀 273m 이며, 2만톤급 대형선박 11척을 비롯한 총 23척의 화물선과 소형어선이나 유조선 등이 동시 접안할수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항내의 묘박지(錨泊地)는 9개소이며, 3척의 선박이 묘박할 수 있다. 마산항이 갖는 하역능력은 연간 957만9천톤이며, 해안 야적장의 넓이는 26만8천m² 약8만 1천 70평으로써 80만 4천톤의 화물을 장치할 수 있다. 내륙 깊숙이 들어온 마산만에 위치한 마산항은 거제도, 가덕도 등의 도서가 천연의 방파제 구실을 해 주는 천해의 영향으로서, 인접한 창원 공업도시와 마산의 수출자유지역과 편리한 육상교통의 발달에 따라 영남 내륙지방까지 배후지가 확대되어 항구적 기능이 강화되면서 일본 및 세계 각지로 연결하는 관문으로서의 중요성이 날로 높아가고 있다. 또한 남해안에 발달한 수산 양식 및 어장의 어획물 집산지이자 연안 도서지역과 해운교통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톡톡히 담당하는 마산항은 국내외적으로도 그 역할이 더욱 중요시되는 항구이다.
삼천포항은 1966년 4월 16일 무역항으로 지정되어 남해안과 서해안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서부 경남의 관문으로, 수출 광석류, 고령토 등을 처리하는 동시에 화력발전소 연료 수송지원항으로 발전하고 있다. 옥포항은 정부의 중화학 공업 육성방침으로 1973년 10월 옥포조선소가 준공되면서 1974년 5월 개항장으로 지정되었다. 최대 100만 D/W급 조선능력을 갖춘 대형조선소로 조선도크와 의장안벽이 축조되었다. 옥포조선소는 최신의 합리적이고 정교한 생산 장비와 설비를 갖춘 최신식 다목적 조선소이다. 조선공업 지원항만으로서 건조 도크2기, 부양식 도크3기, 의장안벽2,738m, 하역안벽100m가 있으며 접안시설로는 2만톤급 1선석이 있다. 장승포항은 1965년 6월 25일 무역항으로 지정되었으며, 부산-거제간 연안여객선의 입출항으로, 도서민과 관광객을 수송하는 거제 동남단에 위치한 관문항이며 수산업지원항만이다.
진해항은 1965년 진해화학 공장이 가동되면서 항만개발이 시작되었으며, 1976년 제 1종 지정항만으로 고시되면서 본격적인 개발이 이루어져 1991년에는 국제항으로 지정되어 부두연장 883m, 1,715천톤 규모의 하역능력을 갖춘 항만으로 성장하였다. 비료, 곡물류, 철재등이 주종화물로 유통되며, 항만시설은 연차적으로 확충되고 있다. 또한 주지하듯이 한국해군의 요람이자 벚꽃의 고장으로도 유명한 항만이다.
통영항은 한려수도의 비경을 간직한 한국의 나폴리로 불리는 곳으로, 1963년 9월 개항한 뒤로 수산물의 수출입을 담당하고 있는 국제무역항이다. 통영지역의 수산물 생산량은 전국 생산량의 10%에 해당하는 연간 27만톤의 수산물로, 이곳은 우리나라 연근해 어업의 전진기지항이자 남해안에 산재되어 있는 크고 작은 섬들을 연결하는 해상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고현항은 1983년 8월 1종지정항으로 지정, 개항장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거제 지역의 일반화물을 해상 수송할 수 있는 접안시설을 갖추고 지역 경제발전에 기여하고 있는 항구이다.
거제조선소는 1백만평의 부지위에 의장안벽 2,615m, 하역안벽 789m, 최대 1백만 DWT급의 선박을 건할 수 있는 건조 도크 3기를 보유하고 있고, 각종 최신 첨단 장비 시설을 갖춘 세계적인 조선소의 위용을 자랑한다. 1978년 이곳에서 선박건조가 시작된 이래 현재 세계3위 규모의 대단위 조선공업기지가 되었다.
마산시의 발전을 주도적으로 이끄는 마산항에 미주 및 유럽지역 항로가 추가로 개설되면 이곳은 명실상부한 동남북아 물류 중추항의 면모를 갖춘 곳으로 전망되는 항구이기도 하다.
1961년 처음 도선사가 부임하였으며 도선사회에 소속되어 있는 모든 도선사가 오늘도 선박의 안전한 도선을 수행하고 있다.